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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표 여성용 내의 기업인 비비안(이전 사명은 남영비비안)이야기를 해볼까요. 창업주인 남상수 명예회장이 2017년 별세하고 경영권을 넘겨 받은 사람이 2세인 남석우 회장입니다. 그런데 3년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처분하고 말았죠.


경영권 승계 후 매출이 늘고 이익도 꾸준히 났으면 회사를 팔았겠어요? 선친이 평생을 바쳐 일구어 놓은 기업인데 그렇게 쉽게 팔 수는 없었을 겁니다. 비비안의 사세는 2010년대 들어서 급격하게 기울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죠.


비비안의 2012년 사업보고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성 내의류는 생활용품에서 패션용품으로 전환되어 정착되고 있는 단계로 (중략) 독특한 스타일과 다양한 색상, 소재의 경량화 및 고급화를 꾀하는 추세' '제품군의 다양화와 달리 뚜렷한 성장세가 없어 포화된 시장 내 경쟁이 더욱 가속화'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 매출이 더 이상 늘지 않는데 소비자들의 기호는 다양해지고 고급화되고 있다면 규모의 경제가 주는 이익은 줄어들겠죠. 획일적인 디자인의 속옷을 대량 생산해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시기는 지난 겁니다. 여성 내의류 시장의 대기업이었던 비비안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여성 내의류 시장은 전형적인 내수 시장이었고, 전통적으로 시장진입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신규 업체들이 해외 브랜드를 수입해 포화된 시장의 귀퉁이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전체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비비안의 대량 생산 체제로는 발 빠른 소규모 신규업체들과 일일이 맞설 수 없었습니다. 비비안은 제품의 기획과 디자인을 직접 개발해 100% 위탁생산하는 구조입니다. 제품의 다양성을 꾀하기 어려웠겠죠.



매출은 2012년 이후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영업이익은 2011년을 끝으로 길고 긴 적자의 늪에 빠집니다. 2019년까지 무려 8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하죠. 한번의 반전이 없습니다. 당기순이익도 2015년 딱 한번 흑자전환 후 다시 적자 행진을 합니다. 사실 2015년 당기순이익도 219억원의 유형자산처분이익 덕분이니 내세울 게 안됩니다.


기울어가는 회사를 물려받았지만, 사업구조를 바꾸려는 적극적이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12년 사업보고서와 2019년 사업보고서, 7년이나 간격이 있지만 사업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Copy & paste 수준입니다. 고쳐 쓸 게 별로 없었던 거죠.


그렇게 오래 적자행진을 하면서도 배당은 꾸준히 했더라고요. 적자가 시작된 2012년 이후 2019년까지 한 해도 쉬지 않고 한 배당의 총액이 132억원입니다. 배당금의 75%는 남석우 회장과 친인척에게 갔습니다. 이런 것도 주주친화적 경영이라고 해야 하나요?


결국 2019년 7월부터 회사 매각 소문이 돌더니 10월에 쌍방울그룹을 우선협상자로 선정하고 11월 최대 주주인 남석우 회장 외 8인이 보유주식 전부를 광림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양도대상 주식은 약 405만주, 계약금액은 주당 1만3300원씩 총 538억원이었습니다.


당초 쌍방울과 광림이 컨소시엄으로 비비안 지분을 인수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광림이 단독 인수하는 걸로 계획을 바꾸죠. 또 2019년 내에 거래를 종결할 예정이었는데, 12월27일 계약금 217억원과 163만여주만 맞바꾸고 잔금과 나머지 지분의 교환은 2020년 1월23일로 연기합니다.


거래를 종결하기 전에 비비안이 한 일이 있습니다.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주식분할을 결정한 겁니다. 액면가 1000원짜리 1주를 100원짜리 10주로 늘리게 됩니다. 주식분할은 광림의 요청 사항이었죠.


남석우 회장은 특수관계자 13인을 포함해 비비안 지분 75.88%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약 521만주 정도 되었죠. 이 중 2019년 12월27일 1차로 넘긴 주식은 남 회장 친가쪽 8인의 지분이었고, 남 회장의 개인 회사나 다름 없는 남영산업㈜가 보유한 120만주(17.48%)와 재단법인 연암장학회 보유 99만5000주(14.49%)는 계약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남 회장 측 지분이 워낙 많아서 광림이 전부 인수하기에는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부 지분만 사와서는 경영권 확보가 어려울 테고요. 그래서 조력자가 필요했습니다. 광림은 2020년 1월21일 잔금 지급과 함께 인수하기로 한 나머지 241만여주를 남회장과 남영산업으로부터 인수해 오지만 즉시 다른 곳으로 장외 매도합니다.


이때 등장한 곳이 케이엘투자조합, 글로리조합, 마루나1호조합(당시 이름은 씨엘투파트너스2호조합), 체리힐4호투자조합 4개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상 외 인물이 있더라고요. 전라남도 영광군에 주소를 두고 자본금 1000만원에 설립된 글로리조합이 비비안 주식 10.95%를 약 10억원에 인수하게 되는데, 여기 이사로 등재된 사람이 진용주라는 분입니다. 진용주라면 삼본전자와 장원테크 등의 인수에 참여해 나중에 필룩스 이사를 지낸 분의 이름이잖아요. 동명이인일까요….


어쨌든 이렇게 남씨 가문과 광림이 지분 거래는 마무리가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쌍방울 광림 비비안의 흥미로운 자금거래가 발생합니다. 비비안이 쌍방울그룹을 우선협상자로 선정하기 직전 쌍방울은 100억원의 전환사채를 발행합니다. 이중 80억원은 타법인 주식을 취득할 목적이었죠. 2019년 10월초의 일입니다.



동시에 광림이 쌍방울을 제3자로 배정해 80억원의 유상증자를 합니다. 쌍방울의 전환사채 발행은 광림의 유상증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광림은 신규 투자를 위해 증자를 한다고 밝혔죠. 광림은 그해 12월에 220억원의 전환사채를 유진케이엘제일차 주식회사를 상대로 발행해 비비안 인수자금을 조달하고요.


그리고 이듬해 2월 비비안이 쌍방울이 발행한 7회차 전환사채 100억원어치를 인수합니다. 7회차 전환사채는 다름 아니라 쌍방울이 광림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기 위해 발행한 그 전환사채이죠.


그런데 이 전환사채는 100억원으로 발행된 후 그 중 5억원을 광림이 다시 매입했었습니다. 첫 인수자인 희호컴퍼니와 고구려37이 나머지 95억원을 보유하고 있다가 비비안에 넘긴 것인지, 그 사이에 사채의 주인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죠.


하지만 희호컴퍼니와 고구려37이 인수자였던 이 전환사채 발행자금은 결과적으로 비비안 → 쌍방울 → 광림으로 흘러 간 셈이 되었죠.


이 자금흐름과 거의 동시에 발생한 또 하나의 자금 고리가 있습니다. 광림그룹과 필룩스그룹 사이에 있었던 거래입니다. 광림이 100억원의 전환사채를 발행해 나노스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고 나노스는 그 100억원으로 행복투자1호조합을 설립합니다. 그리고 행복투자1호조합은 필로스그룹 소속인 이엑스티가 발행한 전환사채를 매입합니다. 광림에서 나노스로, 다시 나노스에서 이엑스티로 자금이 흘러들어간 겁니다.


두 거래는 별개입니다. 광림그룹과 필룩스그룹 간의 거래는 아무래도 장원테크가 이엑스티를 인수하는 거래의 후속 성격을 띤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