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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후공정업체 에이티세미콘이 지난 25일 전환사채를 조기 상환했습니다. 지난해 5월 200억원 규모로 발행했던 제16회차 전환사채 중 130억원을 발생 이자 포함 131억5813만6986원을 주고 취득했습니다. 올해 5월부터 보통주로 전환이 가능(전환가액 1481원)한 사채를 회사가 현찰 주고 사온 겁니다. 이 사채의 만기는 2024년 5월이었습니다.


발행한 전환사채를 회사가 만기 전에 되사 오면 기존 사채권자에게는 상환과 같습니다. 되사 온 사채를 소각해 버리면 상환으로 끝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회사가 보유하고 있다가 매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다시 자금조달이 이루어지게 되죠. 회사가 유상증자를 새로 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를 매각해 자본을 늘리는 것 동일한 이치입니다.


에이티세미콘은 지난해 신기술금융회사인 리더스기술투자를 인수했습니다. 제16회차 전환사채 200억원은 리더스기술투자 인수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자금이었죠. 에이티세미콘은 리더스기술투자 지분 23.96%를 340억원에 인수했는데, 잔금 200억원을 지급할 자금이 필요해 16회차 전환사채를 발행했죠.


이 전환사채를 인수한 곳은 장부상 회사(SPC)인 유진에이티제일차주식회사였습니다. 유진투자증권이 에이티세미콘이 발행한 사모 전환사채를 인수하기 위해 자본금 200원(200억원 아님)으로 설립한 말 그대로 종이회사(paper company)입니다. 종이회사는 전환사채 인수자금 20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어음(ABCP)이나 전자단기사채(ABSTB)를 발행했을 겁니다. 인수할 전환사채를 담보로 말이죠. 종이회사의 차입금입니다.


에이티세미콘이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날 종이회사도 기업어음이나 단기사채를 발행하죠. 종이회사에 들어온 차입금은 에이티세미콘의 전환사채 납입자금으로 쓰이게 되죠. 이 모든 거래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이런 거래를 자산유동화라고 부르죠.



16회차 전환사채는 연 6%의 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발행됐습니다. 매년 2월, 5월, 8월, 11월마다 1.5%씩 네 번에 나누어 이자를 주죠. 유진에이티제일차는 아마 6%보다 낮은 금리로 ABCP나 ABSTB를 발행했을 겁니다. 전환사채에서 나오는 이자 중 일부를 떼고 투자자들에게 ABCP나 ABSTB의 이자를 줍니다. ABCP나 ABSTB는 3개월마다 재발행되는 것으로 설계되었을 겁니다. 3개월마다 만기를 맞게 되지만 자동으로 만기연장이 되는 식일텐데, 투자자가 만기연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투자자를 찾거나 상환을 하게 되죠. ABCP나 ABSTB가 상환하려면 유진에이티제일차도 에이티세미콘에게서 전환사채를 조기상환 받아야 합니다. 전환사채와 ABCP는 같은 운명체인 셈입니다.


에이티세미콘은 전환사채를 발행하면서 사채권자에게는 100% 풋옵션을,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이하 최대주주 등)에게는 100% 콜옵션을 부여했습니다. 사채권자인 유진에이티제일차는 전환사채의 조기상환을 요구할 수 있었고, 최대주주(김형준 대표) 등은 전환사채 전부를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이 조기 상환할 권리는 없었습니다.


사채권자의 풋옵션은 발행 후 9개월이 경과하는 오는 2월11일이 돼야 비로소 행사가 가능했습니다. 아직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가 오지 않았죠. 그런데 어떻게 조기상환이 이루어졌을까요. 사채권자와 회사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상환을 요구하거나 상환을 할 권리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에이티세미콘은 이에 대해 사채권자와 합의했다고 공시했습니다. 경영진도 없는 장부상회사와 합의요? 종이회사에는 뇌가 없습니다.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아요.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의사결정을 하지 않습니다. 의사결정을 하는 건 ABCP(또는 ABSTB) 투자자인데, ABCP는 200억원을 잘게 쪼개서 여러 투자자에게 팔렸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중 130억원의 투자자들이 한날 한시에 조기 상환을 요구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죠. 설사 투자자가 조기상환을 원했더라도 약 보름 정도만 기다리면 2월 11일 이자와 원금을 받을 수 있는 만기가 되니, 그때 가서 재투자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굳이 보름 서둘러 일을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죠.


결국 전환사채 조기상환은 에이티세미콘의 결정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전환사채에 대해 최대주주 등이 콜옵션을 갖고 있잖아요. 최대주주의 동의없이 조기상환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죠. 최대주주 등과 에이티세미콘 이사회가 합의하에 또는 최대주주인 김형준 대표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조기상환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은 조기상환한 전환사채를 소각하거나 재매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주주 등의 동의 없이는 소각이 불가능하고, 제3자에 재매각할 수도 없습니다. 재매각한들 제3자에게는 그냥 표면이자 6%짜리 일반회사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최대주주 등이 콜옵션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발행당시부터 처분권이 김형준 대표에게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인수할 투자자를 따로 구하지 않고 증권사를 통해 장부상회사를 만들어 유동화한 것도 김형준 대표의 뜻에 반해 보통주로 전환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전환사채를 최종적으로 인수할 우군을 확보하기 전에 시간을 벌고자 장부상회사를 이용했을 수도 있죠.


에이티세미콘은 왜 전환사채를 조기상환한 걸까요. 돈이 남아 도는데 마땅히 쓸 곳이 없어 빚을 갚은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은 지난해 12월27일 이사회를 열어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했고, 이에 따라 배정자인 김형준 대표가 2월 16일 80억원을 납입할 예정입니다. 증자대금은 운영자금에 쓰이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상 일 전환사채를 조기 상환하는데 200억원을 쓰고, 김형준 대표가 80억원의 신주를 인수합니다. 돈이 남아돌아 빚을 갚았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빚을 갚는 바람에 운영자금이 부족하게 되었구나' 라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3분기에 리더스기술투자를 인수하고 나서 에이티세미콘은 현금성 자산이 1억원 정도에 불과해 거의 바닥을 보였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더스기술투자 인수를 전후한 재무활동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은 4월부터 380억원에 달하는 꽤 큰 규모의 주주우선배정 유상증자를 추진했습니다. 대부분 차입금 상환에 사용할 목적이었습니다. 증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어 지다 3분기를 다 보내고 10월 6일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사이 주가가 많이 하락해서 발행주식 수를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유상증자 규모는 300억원으로 최초 계획보다 80억원 줄었습니다. 증자대금으로 갚으려던 차입금도 310억원에서 210억원으로 축소됐습니다.


리더스기술투자를 인수한 후인 6월 10회차 전환사채 50억원 중 상상인저축은행이 인수했던 20억원을 만기 전 취득하더니 곧바로 재매각했고, 인수자는 전환권을 행사해 보통주로 바꿨습니다. 10월에도14회차 전환사채 40억원 전액을 만기 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올 들어 200억원의 16회차 전환사채 중 130억원을 조기상환하고 80억원을 증자를 하기로 한 것지요.


두 차례의 증자로 조달한 380억원으로 전환사채 170억원을 만기 전 취득했습니다. 자본이 늘었고 차입금이 줄었습니다. 재무구조 개선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회차 전환사채20억원을 만기 전 취득했다가 다시 재매각해 주식으로 전환되면서도 재무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이 재무구조 개선에 애를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상감자를 하면서 자본잠식에서 벗어났지만 부채비율이 지난해 9월말 현재 396%(개별 기준)로 매우 높습니다. 연결 기준 부채비율도 228.74%로 높은 편입니다. 사실 연결 기준으로 하면 개별 재무제표보다 부채비율이 높아야 정상입니다. 가령, 자본과 부채가 모두 100인 모회사가 50% 지분을 가진 자회사의 자본과 부채도 100이라고 할 때, 연결 기준 부채비율은 200/(100+50)=133%가 되어 모회사 부채비율 100%보다 높아지죠.


그런데 에이티세미콘은 거꾸로 연결기준 부채비율이 에이티세미콘 개별 부채비율보다 낮습니다. 매우 이례적인 사례인데요. 지난해 종속회사가 된 리더스기술투자에 대한 지분율이 18.72%로 매우 낮은데다 리더스기술투자의 부채 전액이 연결기준 부채에 더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회계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기회가 되면 따로 써보겠습니다만, 일단 그런 게 있구나 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부채비율이야 좀 높아도 됩니다. 부채비율 높다고 회사가 망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유동비율입니다. 유동비율은 유동자산/유동부채를 비율로 표현한 것인데, 유동성 또는 단기적인 부채 상환능력의 척도로 쓰입니다.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 지표이기는 합니다만, 부채비율과 함께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입니다)



연결기준 유동비율이 60%로 상당히 낮습니다. 유동자산을 다 처분해도 유동부채의 60% 밖에 상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결기준 유동비율이 낮은 이유는 에이티세미콘 자체의 유동비율이 23.8%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낮아서 그렇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의 낮은 유동비율은 리더스기술투자의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리더스기술투자는 신기술금융회사입니다. 기본적으로 외부 차입으로 조달한 자금을 바탕으로 지분투자나 대출로 수익을 창출합니다. 그런데 리더스기술투자가 단기차입을 하거나 옵션부 전환사채를 발행하면 에이티세미콘의 연결 유동비율이 더 낮아집니다. 리더스기술투자가 사업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의 유동비율이 낮은 건 기본적으로 부채가 많고 부채 중에 단기성 부채 비중이 높기 때문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전환사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9월말 현재 1086억원의 유동부채 중 전환사채가 346억원으로 가장 많습니다. 특히 산업은행 단기차입금 230억원을 장기차입금으로 돌리는 등 차입구조를 장기화하는데 노력했지만, 전환사채가 174억원 늘어나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이 전환사채를 만기 전 취득하고, 투자자를 교체해 주식으로 전환하는 데 신경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상증자로 전환사채를 사들이면 부채비율이 하락하고 유동비율은 올라가서 일석이조가 되죠.


그런데 조기상환(만기 전 취득)했다고 해서 전환사채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소각하지 않으면 재매각할 가능성이 높고 재매각되면 유동비율이 다시 낮아집니다. 에이티세미콘은 만기 전 취득한 전환사채 14회차와 16회차를 소각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16회차 전환사채 130억원은 최대주주인 김형준 대표 또는 그 특수관계인이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고, 처음부터 그럴 계획을 갖고 발행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형준 대표 측의 지배력 강화 또는 보통주 전환 후 매각으로 차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죠.



에이티세미콘 입장에서 유동비율을 높이는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전환사채가 보통주로 전환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려면 주가가 전환사채의 전환가액보다 상승해서 사채권자가 전환 시 얻는 이득이 생겨야 합니다. 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전환가액은 발행당시에 비해 크게 내려와 있습니다. 최근 증시가 연일 폭락하면서 에이티세미콘 주가도 1100원대 초반으로 속락해 전환가액은 다시 하향 조정될 것 같습니다. 전환가액이 하향 조정되고도 주가가 지지부진하면 에이티세미콘은 유동비율을 급격히 개선하기 어려울 겁니다. 반대로 주가가 큰 폭으로 올라준다면 손 안대고 부채비율과 유동비율의 동시 개선을 이룰 수 있고, 부채 상환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인투자자들은 대규모 신주 물량의 등장으로 피해를 볼 텐데요. 에이티세미콘이 건전해진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더 많은 매출과 이익을 올려 실질적인 기업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으로 보상을 해야 마땅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