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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에 또 하나의 유감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흥국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그 여파로 국내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의 해외 차입 여건이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외화채에 대한 콜옵션 행사 포기가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우리은행이 외화 후순위채에 대해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아 금융시장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던 사건의 재판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합니다.
최근 국내 금융시장이 매우 혼란스럽고 위태위태합니다. 그러나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행사 포기를 2009년 당시 우리은행 후순위채의 그것과 빗대는 것은 다소 무리일 것 같습니다. 금리급등과 달러 강세로 금융시장이 파열음을 내고 있는 것은 매우 걱정스럽지만, 2009년과 지금의 위기는 그 양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국내 금융시장의 가장 큰 리스크는 금리 급등과 그로 인한 주택가격 하락이 어쩌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스(PF) 시장을 파국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주택 소비자인 가계 뿐 아니라 부동산 개발업자(시행사)와 건설회사, 증권사나 카드사 또는 신탁회사 등의 금융회사에게 매우 민감한 이슈입니다.
하지만 외화유동성 위기는 아직 아닙니다. 달러가 강세를 보인다고 해서 곧바로 외화유동성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외화유동성 위기는 국내 금융회사, 그 중에서도 은행들이 외화부채를 갚을 달러를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때 발생합니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금리가 높아져도 은행들의 외화수급에 문제가 없으면 외화유동성 위기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흥국생명의 콜옵션 행사 포기를 보며 2009년 우리은행의 사례를 떠올리는 것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나라는 2000년 이후 순대외채권국이 되었습니다. 외채보다 대외채권이 더 많았습니다. 2005년에는 그때까지 사상 최대인 1559억 달러의 순대외채권(대외채권-대외채무)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한국은행이 환율안정을 위해 운용하는 외환보유액 덕분입니다. 외환보유액과 정부를 제외한 민간부문은 여전히 외채가 더 많았습니다.
민간부문의 순대외채무(대외채무-대외채권)는 2006년 67%, 2007년에는 72%나 급증했습니다. 금융위기 직전에 민간부문을 통해 외화증권 발행 또는 외화차입을 통해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었다는 겁니다. 외화는 대부분 국내은행과 외국은행의 국내지점의 단기차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은행들의 단기 외채가 급증했죠.
2007년말 현재 민간부문의 순대외채무는 1555억 달러에 달했는데, 은행을 위시한 예금취급기관의 순대외채무가 1204억 달러로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또 예금취급기관의 총대외채무는 1934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그 중 1345억 달러가 1년내 갚아야 할 단기채무였습니다.
2008년 9월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고 전 세계에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국내 유입된 외화는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습니다. 외국인 주식자금이 이탈했고 국내 은행이 단기로 빌린 외화차입에 대한 회수가 이루어졌습니다. 국내 은행들이 해외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해 외채를 갚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민간 기업에 빌려 준 외화대출은 회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업들도 달러가 부족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요. 은행에 달러가 없으면, 일반 기업은 물론 다른 금융권에도 달러가 돌지 않습니다. 원화나 외화나 은행이 주요 공급처이기는 마찬가지거든요. 국내 금융시장은 달러 공백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은행은 외화의 대규모 유출이 발생하던 와중인 2009년 2월 외화 후순위채에 대한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국내 은행들의 외화유동성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은행들이 발행한 외화채권에 대한 상환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신호로 국제 금융시장에 전달됩니다. 우리나라 정부와 은행의 국제 신인도를 나타내는 신용디폴트스왑(CDS) 스프레드가 급등하는 등 한국에 대한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당시에도 국내 은행들이 발행한 후순위채를 5년 이후 콜옵션을 행사해 조기상환하는 게 관례화(?)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은행이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자, 금융시장에서는 시장의 신뢰를 깨는 행위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러자 신한은행 기업은행 등 다른 은행들은 "우리는 콜옵션 행사를 하겠다"며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도록 방어합니다.
하지만 외화유동성 위기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달러가 말라 있기는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결국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가 공적자금 성격인 20조원의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해 은행에 투입합니다.
최근 금융시장의 상황은 2009년 금융위기 당시의 전개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미국을 필두로 공격적인 긴축정책으로 돌아서면서 금리가 급등하고 달러 값이 치솟고 있죠. 레고랜드 ABCP 부도로 부동산PF 시장이 급속도로 얼어붙은 것도 유사합니다. 흥국생명의 외화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가 2009년 우리은행의 사례를 연상시키는 게 무리는 아닙니다.
코로나19 이후 국내 은행들은 다시 순대외채무 상태가 되었습니다. 단기와 장기 모두 외국에서회수할 채권보다 지급할 채무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순채무 556억 달러, 단기 순채무 246억 달러로 2009년 금융위기 당시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은행들의 대외채무는 올 들어서도 늘고 있습니다. 대외채무의 규모가 커지는 게 반가울 것 없지만, 은행들의 외화 조달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자금의 조달이 가능하다면 유동성 위기는 없습니다.
비은행 금융기관들은 어떨까요. 코로나19 이전보다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상 최대 수준의 순대외채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은행 금융기관은 어디일까요. 외화채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금융기관은 대표적으로 보험사입니다. 자산과 부채의 듀레이션을 맞추기 위해 장기 외화채권을 보유합니다. 비은행 금융기관들은 단기적으로도 순대외채권 보유 상태입니다.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은행에 유동성 규제가 도입되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라고 하는 겁니다. 향후 3개월내 예상되는 순현금유출액의 100% 이상에 해당하는 고유동성 자산(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국공채 등)을 보유하도록 한 것인데, 원화는 물론 외화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3개월내 예상되는 순외화유출액 대비 100% 이상의 외화고유동성 자산(미국 국채 등)을 보유해야 합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책으로 원화는 90%, 원화는 80%로 완화되어 있습니다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말 현재 자료가 제공되지 않은 광주은행과 제주은행을 제외한 국내 모든 은행의 외화 LCR은 100%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물론 LCR이 100%가 넘는다고 해서 외화유동성 문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죠. 3개월 후에는 또 어떤 상황으로 바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행을 포함한 국내 금융기관들의 외화자산과 외화부채의 수준으로 볼 때, 최근의 금리급등, 환율급등, 국내 자금시장의 경색이 2009년과 같은 외화유동성 경색의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아직 높게 보기 어렵습니다.
올해 하반기 이후 외화 유출은 더욱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과 미국간 금리차이가 더욱 벌어지면서 달러/원 환율이 오를 것이란 기대가 여전히 높으니까요. 주식자금 뿐 아니라 채권자금 역시 순유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기업들이 외화를 빌리는 조건은 점점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일반 외화채권이든, 신종자본증권이든 여유가 있다면 미리 갚을 수도 있겠지만, 훨씬 더 나쁜 조건으로 빌려 만기가 오지 않은 채무를 앞당겨 갚는 선택을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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