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의 기사는 작성 후 최소 1주일 경과된 시점에 무료 공개되고 있음에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산업용 로봇 회사인 코스닥 상장사 휴림로봇이 2018년 이후 이어지고 있는 영업적자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간에 당기순이익이 흑자였던 해는 2020년과 지난해 두 차례 뿐인데, 2020년은 경영권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던 삼부토건의 주가 상승 덕분이었고, 지난해는 종속회사인 휴림인프라투자조합이 보유하고 있는 상장사 파라텍의 주가상승 덕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휴림로봇은 본업에서 지속적으로 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가끔씩 주식투자에서 이득을 보는 회사입니다.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은 이미 수 차례에 걸쳐 휴림로봇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주로 어떻게 삼부토건의 최대주주가 되었고,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파헤치는 내용이었습니다. 파라텍 등 투자활동의 미스터리에 대한 기사도 있었습니다. 2년 전 현대차그룹 납품업체인 디아크와 이동통신 안테나 제조업체 더에이치큐(THQ) 인수를 다룬 게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디아크(현 휴림에이텍) 인수 이후 휴림로봇(연결 기준)의 매출 외형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200억원대에 그쳤던 매출이 지난해 827억원을 기록했고, 올해 1분기에도 2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시현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죠. 바로 설비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자를 지속하면서도 삼부토건, 디아크, 더에이치큐 등을 인수하는데 수백억원을 쏘는 것과 달리, 설비투자 등의 자본적 지출에는 최근 3년간 총 48억원을 쓴 게 전부입니다.


로봇산업의 패러다임이 노동대체 수단인 전통적 로봇에서 지능형로봇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능형 서비스로봇을 신성장동력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와 관련된 설비투자계획은 찾아볼 수 없고, 서비스로봇 관련 매출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지난해에는 서비스로봇 매출이 전혀 없죠.


휴림로봇은 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나 사모 전환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경향이 강했는데요. 약 3년 동안 자금조달에 그리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올해 이전 마지막 유상증자는 2021년 10억원짜리 소액 증자였고, 전환사채도 2020년 휴림홀딩스가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최대주주가 될 때 함께 발행한 12회차(100억원)와 13회차(40억원) 이후 발행이 끊겼죠.


휴림로봇이 올해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지난달 제3자 배정 유상증자(80억원), 일반공모증자(596억7500만원)를 연이어 실시하고 전환사채 발행으로 150억원을 추가 조달하는 등 실탄 마련에 바빴습니다. 총 826억7500만원에 이릅니다.


자금조달이 이상할 건 없습니다. 본업에서 현금흐름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사내 유동성은 말라갈 것이고, 운영자금과 투자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휴림로봇이 갑자기 대규모 자금조달에 나선 이유는 투자본능이 깨어났기 때문이었죠. 사실상 전부가 타법인 주식 등을 취득하기 위한 자금이었습니다.


휴림로봇이 군침을 삼켰던 회사는 이화그룹 소속 상장 3사 중 하나인 이큐셀이었습니다. 이화전기와 이아이디로부터 이큐셀 지분 86.65%를 597억원에 양수하고, 380억원의 신주를 인수할 계획이었습니다.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무려 1000억원에 육박하는 거래가 이루어질 뻔했죠.



하지만 이큐셀이 상장폐지되면서 구주 양수계약은 해제되었죠. 휴림로봇은 이아이디 등과 맺은 주식 양수도계약이 해제되었고 계약금을 돌려받을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미 납입한 유상증자 대금 230억원도 회수한다고 했죠. 150억원의 추가 신주 매입은 아직 대금납입 전이니 취소 수순으로 갈 것 같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휴림로봇은 인수 철회에 대해 이큐셀의 상장폐지 결정으로 주주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죠. 이 말을 수긍하기 참 어려운 게, 상장폐지 위기에 놓인 회사를 인수하려는 시도 자체가 주주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기 때문이죠.


일시적으로 위험에 빠진 회사를 싸게 인수하는 것도 때로는 효과적인 M&A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큐셀은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최근 3년 연속 영업이익을 내고 있었습니다. 오너 리스크가 큰 이화그룹에서 벗어나 괜찮은 주인을 만나면 정상화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휴림로봇이 괜찮은 주인이 됐을 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이큐셀 인수가 원래 예정대로 이루어졌다면, 가장 큰 수혜자는 이아이디와 이화전기였을 겁니다. 거의 600억원에 달하는 현금으로 채무 상환 등 재무개선에 사용하거나 재기의 발판이 되었을 수도 있겠죠. 휴림로봇은 이화그룹의 구세주가 되었을 겁니다.


이큐셀에 대한 380억원의 유상증자 계획은 상장폐지 결정을 막기 위한 시도였을 겁니다. 이큐셀의 가장 큰 문제였던 오너 리스크가 구주 매각으로 사라지고, 대규모 유상증자로 회사에 새 돈이 수혈되면 상장폐지 결정을 번복해 달라는 명분으로 내세울 생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230억원의 유상증자대금이 납입되고 3일만에 코스닥시장위원회는 이큐셀의 상장폐지를 결정했고, 이큐셀이 상장폐지 결정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해 현재 정리매매가 보류된 상황이죠.


이큐셀 인수 무산으로 휴림로봇은 약 1000억원에 달하는 현금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그 동안의 이력으로 볼 때, 이 자금이 회사의 본업을 위한 설비투자 등의 용도로 사용될 것 같지는 않고, 새로운 먹이감을 찾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짚어봐야 할 게 있습니다. 휴림로봇과 이큐셀은 이아이디 및 이화전기 보유 지분에 대한 매매계약이 해제되었다고 각각 공시했습니다. 상장폐지 결정이 이루어지면 계약이 해제된다는 조건이 있었죠. 하지만 이큐셀은 휴림로봇을 제3자로 한 두 차례의 유상증자에 대해 취소 공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휴림로봇은 지난달 29일 공시에서 타법인 주식 등 양수결정 전체항목을 정정대상으로 하면서 이큐셀 상장폐지로 계약이 해제되었다고 했는데, 이 공시는 지난 6월 이루어진 구주매매계약에 대한 취소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큐셀에 이미 납입한 유상증자대금 230억원을 돌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큐셀은 지난달 23일 230억원의 납입이 완료되었다는 증권 발행결과를 공시했습니다. 증자는 이미 이루어졌고, 휴림로봇은 이날로 이큐셀의 34.6% 지분을 보유한 주주가 된 셈이죠. 그런데 쉽게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 이큐셀은 아직 유상증자에 따른 자본금 변경 등기를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등기가 되지 않았다면 양 당사자가 거래 자체를 무효화할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이미 등기가 되었다면 신주발행을 무효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주발행 무효는신주를 발행한 날로부터 6개월 내에 주주, 이사, 감사가 소를 제기하는 것으로만 주장할 수 있고, 일단 신주가 발행되고 나면 상당한 불공정이나 심각한 절차상 흠결이 없이는 법원으로부터 무효결정을 받아내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령 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유상증자가 이루어졌다거나, 기존 주주의 신주인수권을 배제할 상당한 사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3자 배정 방식으로 신주를 발행했다거나 등의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법령이나 정관의 중대한 위반 또는 현저한 불공정이 있고, 그것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정도라고 평가되는 경우에 한하여 신주발행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죠.


상법에 따르면 신주를 인수한 자는 변경등기를 한날로부터 1년이 경과한 후에는 주식청약서나 신주인수권증서의 요건에 흠결을 이유로 인수의 무효를 주장하거나 사기, 강박 또는 착오를 이유로 인수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등기 후 1년이 경과하기 전에는 요건의 흠결이나 사기, 강박, 착오가 있을 경우 인수의 무효나 취소를 주장할 수 있다는 얘기인데, 여기에도 해당될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큐셀의 등기가 이루어지기 전에 신주발행이 취소되어야 자칫 자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요. 이큐셀이 신주발행을 취소하고 휴림로봇에 납입대금 230억원을 돌려주겠다고 합의를 한 상황이라면, 두 회사는 왜 유상증자 취소 공시를 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