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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이 5억 달러 규모 외화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은 것은 시장의 관례를 깬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콜옵션 미행사는 2009년 우리은행 이후 처음이라고 하네요. 흥국생명이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자, 글로벌 금융시장에서의 신뢰 하락으로 한국 금융기관들의 외화조달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은 2009년 금융위기 당시의 데자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은행이 외화 후순위채에 대한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시장의 관례를 깼다는 비난이 폭주했고,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국내 금융기관들의 재무건전성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2009년 우리은행은 후순위채를 조기상환해야 마땅했을까요. 후순위채를 조기상환하려면 5억 달러의 외화가 필요했는데, 외화유동성은 부족한 상황이었고 상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롭게 후순위채를 발행하려면 치솟는 환율과 폭등하는 금리를 부담해야 했습니다. 아니, 설사 금리를 높인다고 해도 발행이 가능할 지 불확실했습니다. 보유한 외화자산을 회수해 어찌어찌 조기상환이 가능하다고 해도, 은행의 가장 중요한 재무지표인 BIS 자기자본비율의 하락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흥국생명이 2017년 5억 달러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한 것은 보험사의 자본적정성 지표인 지급여력비율(RBC)을 높이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신종자본증권은 채무증권이지만, 만기가 매우 길고 후순위 성격이기 때문에 일정 한도만큼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을 해 줍니다. 신종자본증권은 보험사 등 금융회사들이 유상증자 대신에 자본확충에 활용하는 주요 수단입니다.

흥국생명의 RBC비율은 6월말 현재 157.8%로 보업험법상 하한인 100%를 넘지만 금융당국의 권고 기준인 150%를 살짝 웃돌았습니다. 흥국생명 뿐 아니라 여러 생보사의 RBC 비율이 150%에 근접해 있는데요. 금리가 지속적으로 오르면서 보험사들의 주요 자산인 매도가능증권 평가액이 하락했기 때문입니다. RBC비율은 올해 하반기에 더욱 하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흥국생명을 포함한 몇몇 생보사의 경우 9월말 기준으로는 150%를 밑돌 수도 있습니다. 내년부터 보험사의 부채인 보험금도 시가평가를 하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보험사들의 자본확충이 시급한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별 보험사 입장에서 자본확충 수단인 신종자본증권을 새로운 신종자본증권으로 차환발행하지 않고 자체 유동성으로 조기상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흥국생명은 당초 새로운 신종자본증권 3억 달러와 후순위채 1000억원 등을 발행해 기존의 5억 달러 신종자본증권을 조기상환하려고 했습니다. RBC 비율 하락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긴축정책으로 국제금융시장의 조달금리가 크게 오르고 국내 시장에서는 레고랜드 사태 여파로 자금시장이 경색된 상황이라 채권 발행이 쉽지 않았습니다.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금리가 흥국생명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높았다고 합니다. 결국 흥국생명은 금융감독원과 협의해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을 하지 않기로 합니다.
당연한 조기상환을 기대했던 투자자들은 불만이 컸겠지요. 자금을 회수해 더 높은 금리를 주는 곳에 투자할 기회를 잃게 되었으니까요.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가 국내 보험사들의 외화조달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당연히 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것은 만기가 30년 이상으로 매우 길어서 발행사의 상환의무가 매우 약해서 자본으로 인정해 준 게 신종자본증권인데, 국내 금융회사들이 발행한 '자본 아닌 자본' 신종자본증권이 그 동안 거의 예외 없이 발행 후 5년마다 상환이 되어 왔다는 그 관례 아닐까요. 예외 없이 5년마다 상환이 됐다면 형식적인 만기는 30년이라고 해도 실질 만기는 5년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금융회사가 5년 후 조기상환을 하지 않을 경우 시장의 관례를 깼다는 이유로 자금조달에 문제가 생기고 금융시장 전반에 충격을 준다면 콜옵션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닌 '의무'인 셈이죠.
흥국생명은 결국 입장을 바꿔 신종자본증권을 조기상환하기로 했습니다. 4개 은행이 흥국생명의환매조건부채권(RP) 4000억원어치를 매입하기로 했고, 보험사 대출로 1000억원을 채우기로 했답니다. 환매조건부채권 매도는 단기적인 자금조달 수단이기 때문에 금방 갚아야 합니다. 보도로는 태광그룹의 계열사들이 십시일반 흥국생명의 자본확충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군요. 자본확충이 실시되면 RP매도로 보험사 대출로 조달한 자금을 상환하게 되겠죠.
흥국생명이 콜옵션 행사를 연기했다가 혼쭐이 났으니 콜옵션 행사기한이 도래하는 다른 생명보험사들은 이제 콜옵션을 만지작 거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신종자본증권을 조기상환하게 될 것입니다. 금융당국도 시장의 불안을 막기 위해 조기상환을 독려할 것입니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조기에 안정되지 않는다면 다른 생명보험사들 역시 새로운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해 상환자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흥국생명의 예에서 보듯이 발행금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으로 높을 수 있고, 어쩌면 투자자를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지급여력비율에 여유가 많고 유동성도 풍부하다면 자체 자금이나 다른 차입수단을 동원해 상환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유상증자 등 추가 자본확충이 불가피합니다. 조기상환으로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기가 30년 이상으로 길다는 이유로, 상환순위가 후순위라는 이유로 신종자본증권을 자본으로 인정해 주는 현 제도는 명분을 잃습니다. 예외 없이 5년이면 상환되는 채권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닌 부채이니까요. 그 동안 국내 금융회사들은 5년짜리 채권을 발행해 놓고 자본으로 계상을 해 왔고 금융당국은 이에 공조해 온 셈입니다.
신종자본증권은 중도상환을 하지 않는 경우 금리 상향조정(스텝 업) 의무가 있는 하위 신종자본증권(Innovative Hybrid)와 스텝 업 조항이 없는 상위 신종자본증권(Non-Innovative Hybrid)로 나뉩니다. 상위 신종자본증권은 콜옵션을 행사해 조기상환을 하지 않아도 투자자에게 추가 금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조기상환의 유인이 없습니다. 반면 하위 신종자본증권은 조기상환을 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진 추가 금리를 줘야 하니까 발행한 은행이나 보험사의 조기상환을 유도하게 됩니다.

신종자본증권의 태생지인 유럽경제지역(EEA)에서도 금융회사들의 신종자본증권을 기본자본의 일정 수준만큼 자본으로 인정을 해 줍니다. 그 한도는 국가별로 15%에서 50%까지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리 스텝 업 조항이 있는 하위 신종자본증권에 대해서는 발행 후 10년이 지나도 콜옵션 행사를 통해 중도상환을 하지 않는 경우에만 기본자본의 15% 범위에서 자본으로 인정해 줍니다. 바젤위원회의 권고사항입니다.
국내 은행이나 보험사가 발행하는 신종자본증권은 모두 스텝 업 조항이 있는 하위 신종자본증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모두 발행 후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콜옵션 행사를 통해 조기상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기준대로라면 자본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보험사의 신종자본증권의 발행 조건은 꽤 엄격합니다. 조건에 합당하게 발행이 되어야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만기가 없거나 30년 이상이면서 동일 조건으로 연장이 가능해야 합니다. 콜옵션 행사(조기상환)는 상환 후에도 RBC 비율이 150% 이상이어야 하고, 새로운 신종자본증권이나 더 강한 자본성을 가진 자본조달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또 금리조건이 발행당시에 비해 현저히 불리하다고 인정될 때 금융감독원장의 사전 승인을 얻어 조기상환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은 이 기준들과 배치됩니다. 조기상환 전에 자본성이 같거나 더 강한 자금조달로 대체할 수 없었고, 금융시장의 여건은 조기상환을 하지 않는 게 유리했습니다. 상환 후 RBC비율이 150%를 넘을 수 있었는지도 불확실합니다.
시장 상황이 새로운 발행에 매우 불리할 때 흥국생명을 포함한 국내 생보사들이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신종자본증권을 자본확충의 수단으로 인정하는 현 제도는 재검토를 하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신종자본증권이 자본의 일부로 계속 받아들여 지려면, 발행자의 상황이 조기상환에 여의치 않을 때 콜옵션이라는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시장의 관례가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신종자본증권을 자본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손 보는 게 마땅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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